금샘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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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금샘문학상수상작 동화부문
  • 이름 관리자
  • 작성일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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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김완수)

 

<1.현수의 샘>

 

여름 가뭄이 가을까지 이어지자 금정산의 계곡도 나날이 가물었어요산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먼저 물을 차지하려고 잦은 싸움을 벌였어요물 때문에 빚어지는 싸움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산속에서 사이좋게 살아가던 동물 들도 마실 물이 부족해지자 으르렁거렸던 거예요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우제를 올려 보기도 했지만비는 좀처럼 내릴 줄 몰랐어요단비를 바라는 건 범어사의 스님들이나 불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그래서 모두 하나같이 부처님께 단비를 내려 달라며 밤낮으로 간절히 불공을 드렸어요하지만 하늘은 무심한지 비는 내릴 것 같다가도 금세 구름이 걷히고 말았어요산 아랫마을에서 시작된 각박한 분위기는 금정산 산 곳곳으로 번져 올랐어요.

현수 아니냐네가 여기서 뭘 하느냐?”

아랫마을로 탁발을 나가 공양미를 얻고 돌아오던 큰스님이 암자 아래 얕은 계곡에 쪼그려 앉아 있는 동자승 현수를 보고 물었어요현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에게 예를 갖추고는 파르스름한 머리를 긁적였어요가을이 찾아든 계곡에선 가끔씩 쌩 불어오는 산바람 때문에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어요현수가 승복을 여몄어요.

계곡물이 어떤지 살피고 싶어 나와 봤습니다.”

현수가 쑥스러운 듯 발개진 얼굴로 대답했어요.

예불 시간에 꾀 부리러 나온 건 아니고?”

스님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얼굴엔 인자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어요현수가 방긋 웃기만 했어요.

그래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스님이 가벼워 보이는 바랑을 내려놓으며 현수 곁에 앉았어요초여름까지만 해도 탁발을 나갈 때마다 꽉 찬 바랑이었지만가뭄 이후로 바랑엔 쌀이 절반도 차지 않았어요.

짐승들의 목이 마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짐승들도 생명이 귀한 중생인데사람 들이 먼저 물을 가지려 하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지요?”

현수가 똑 부러지게 말하자 스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어요.

허허네가 그새 불덕을 입었나 보구나그런 생각도 다 하고.”

스님이 기특하다는 듯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스님이 계곡물을 빤히 바라봤어요현수도 스님의 눈이 간 곳에 눈길을 두었어요현수는 물고기들을 찾았지만그 흔하던 피라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 뭐가 보이느냐?”

스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현수가 당황했어요현수가 계곡물을 유심히 보다가 스님에게 고개를 돌렸어요.

가문 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현수의 대답에 스님이 빙그레 웃었어요스님이 현수는 바라보지도 않고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목을 축였어요스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쳐다봤어요.

물은 끊임없이 흐르며 저를 비우는데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가 보구나가뭄이라지만 우리도 물처럼 욕심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얼마 나 좋겠느냐?”

스님의 말에 현수는 눈만 끔뻑거렸어요.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구나어서 암자로 돌아가자.”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자 스님이 바랑을 메고 앞장서 산길을 올랐어요현수가 그림자처럼 묵묵히 스님의 뒤를 따랐어요.

 

온 산에 단풍이 곱게 들자 계명암도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현수는 새벽에 잠에서 깨 가랑잎들이 덮인 마당을 쓸기 위해 밖으로 나왔어요더위는 한풀 꺾였지만가뭄 때문에 산이 새벽빛에도 타들 것만 같았어요그런데 오늘따라 올려다본 하늘엔 아름다운 구름들이 수놓아져 있었어요구름들은 산봉우리마다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어요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던 현수는 새벽부터 백일기도를 드리려 찾은 보살 아주머니들을 보고 합장했어요현수는 싸리비를 찾으러 암자 뒤편으로 가다가 기도를 마친 아주머니들이 산 정상 쪽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어요.

보살님도 그 소식 들으셨지요고당봉 근처의 바위 봉우리 정수리에 신기한 샘 이 있다는데그 샘이 참 영험하다네요.”

정말이요금시초문인데거참신기하네요어떻게 높은 바위에 샘이 있을 수 있지요?”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초저녁에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바위 봉우리를 찾았다가 샘에서 이상한 형상을 봤다지 뭐예요그 샘이 금샘이라나?”

이상한 형상이라니요?”

글쎄신통하게 이 가뭄에도 샘이 마르지 않아 물이 금빛으로 고여 있는데거기 서 또 금빛 물고기를 봤다는 거예요.”

뭔지 모르겠지만그게 정말이라면 자비하신 부처님의 모습 아니겠어요드디어 우리 마을의 가뭄이 해결되려나 봅니다.”

그때 암자 선방에서 스님이 깼는지 헛기침이 들려왔어요현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지만냉큼 뒤편으로 싸리비를 찾으러 갔어요현수는 아주머니들을 힐긋 돌아보다가 스님이 깨어나면 신기한 샘에 대해 물어보리라 마음먹었어요현수가 싸리비를 들고 오는데스님이 그새 마당으로 나와 아주머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현수는 마당으로 가려다가 싸리비를 내려놓고 스님에게 합장하며 다가갔어요.

나보다 먼저 일어났구나네가 이제 물고기가 다 된 모양이다.”

스님이 현수를 보고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현수는 부끄러운 웃음을 띠다가 궁금증을 못 참고 스님에게 아주머니들이 나눴던 얘기를 꺼냈어요.

스님아까 보살님들에게서 들었는데금빛 물은 뭐고금빛 물고기는 무엇인지 요정말 부처님께서 가뭄을 해결해 주시는 건가요?”

녀석호들갑은.”

스님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현수는 괜한 물음에 꾸지람이 이어질 것 같아 잔뜩 긴장했어요그런데 스님의 얼굴이 곧 환하게 펴졌어요.

너도 들은 모양이구나부처님의 자비는 헤아릴 수 없어서 우리의 정성이 지극 하면 언제든 영험한 기적을 보이신단다.”

그럼 저도 그 금샘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님의 얼굴이 굳어졌어요.

나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인데그새 욕심이 찬 거더냐네 마음에 가득 찬 욕심 을 다 비우거라!”

현수는 스님의 서릿발 같은 말에 주눅이 들었어요.

네 불심이 깊어지면 그때 금샘을 볼 수 있을 테니 마음을 비우고때를 기다리 거라.”

스님이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하자 현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어요현수는 스님의 말이 서운했지만언젠간 금샘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어요현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으로 갔어요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반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암자에 모인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어요빗방울이 굵어지자 사람들이 불상 쪽을 향해 합장하며 머리를 조아렸어요현수도 사람들을 따라 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봤어요현수는 승복이 젖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맘껏 맞았어요.

 

현수가 다음 날 오후에 제법 깊어진 계곡에서 승복을 벗어 놓은 채 멱을 감고 있었어요그때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던 스님이 현수를 보며 반가워했어요.

불어난 계곡물을 보니 너도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 려고?”

현수가 대답 대신 스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네게 한 가지 비밀을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마침 잘 만났다.”

스님이 두둑해 보이는 바랑을 내려놓고 물가에 앉았어요몸에 물기도 마르지 않은 채 물 밖으로 나온 현수의 귀가 솔깃해졌어요.

이건 네게만 얘기해 주는 것인데범어사 본당 종루에 가면 귀한 보물들을 찾을 수 있을 거란다부처님이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온 물고기로 나타나신 것처럼 부처님이 이승에서 하늘과 물의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지.”

스님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 아니죠?”

허허내가 귀한 공양미를 얻어 오고서 왜 네게 허튼소리를 하겠느냐?”

현수는 아직도 의심스럽다는 듯 스님의 얼굴을 들여다본 뒤 한걸음에 범어사 본당으로 갔어요저녁놀에 물드는 현수의 등 뒤로 스님의 미소가 물결처럼 번졌어요.

 

현수는 범어사 일주문에 들어서자 경내를 한 번 빙 둘러본 뒤 종루로 갔어요현수는 성큼성큼 가다가도 스님들을 만날 때마다 공손히 멈춰 서서 합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어요하지만 스님들의 나긋한 눈빛과 마주할 때에도 현수의 마음은 종루에 가 있었어요종루가 가까이 있는 보제루가 보일 때현수가 미소를 머금었어요보제루에서 오른쪽으로 얼마쯤 가자 드디어 높직한 종루가 눈에 들어왔어요현수는 종루로 달려가 1층을 잠깐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했어요스님이 말한 보물을 찾을 수 없자 현수는 조바심이 났어요현수는 조심스럽게 누각에 올랐어요그런데 순간 누마루에 선 현수의 입이 헤벌어졌어요현수는 금세 구름 모양이 새겨진 금속판과 속이 비워진 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무를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현수는 그것들이 스님이 말한 보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현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현수는 만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한참 동안 운판과 목어를 차례로 들여다봤어요현수가 기둥처럼 우두커니 서서 운판에 눈을 둘 때어디서 새카만 까마귀 떼가 날아들어 하늘을 뒤덮었어요그리고 눈을 돌려 목어를 바라볼 땐 어느 법당의 처마 끝에서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눈을 가만히 감아 보던 현수는 문득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늘 깨어 있어 몸을 깨끗이 하고마음을 가다듬으라는 스님의 말이 생각났어요현수가 눈을 번쩍 떴어요현수는 운판과 목어가 연이어 소리를 내는 것 같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어요.

밤새 잠을 못 이룬 현수는 다음 날 동이 트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스님이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한 현수는 가만히 선방 문을 열고 나와 마당으로 나왔어요현수는 마당에 가득 쌓인 가랑잎들을 힐긋 보다가 작심한 듯 갑자기 발길을 산길로 돌렸어요현수는 며칠 전에 아주머니들이 말한 신기한 샘으로 가고 있었던 거예요아직 날이 밝지 않아 길이 환하지 않았지만샘으로 가는 현수는 힘든 줄 모르고 산을 올랐어요현수는 바위 능선을 따라 펼쳐진 길을 쉼 없이 올랐어요그러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크고 작은 바위들로 뒤덮인 산마루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현수는 넓고 평평한 돌에 앉아 잠깐 숨을 고른 뒤 일어났어요현수는 두리번거리며 바위 무리에서 샘이 있을 만한 바위를 찾았어요그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선바위 하나가 눈에 띄자 현수의 얼굴이 새벽빛보다 밝아졌어요선바위가 놓인 산마루엔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어요현수는 바위 앞에서 두 팔을 벌려 바위를 껴안아 봤어요바위는 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널찍하고 높다랐어요현수는 용기를 내 바위를 붙잡고 오르려다가 순간 앞에 깎아지른 벼랑이 보이자 눈앞이 아찔했어요부옇게 떠 있는 안개가 얼굴에 와 닿아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졌어요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어요현수는 까치발을 하고서 다시 손을 뻗어 바위를 힘껏 붙잡았어요하지만 바위는 현수의 무모함을 나무라듯 꿈쩍도 않은 채 현수가 오르는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어요현수는 다리의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어요그런데 그때 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어요.

네 마음에 가득 찬 욕심을 다 비우거라!”

현수가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어요현수는 욕심을 비우는 날에 금샘을 꼭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어요현수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어요돌아서는 현수의 등 뒤로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아침 햇빛이 오색찬란하게 반짝였어요.

 

 

<2.비밀의 성가퀴>

 

금정산성은 본래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지만지금의 모습을 갖춘 산성 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의 큰 피해를 입은 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신하 들의 건의로 새로 쌓은 것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멀리 부산의 금정산성으로 역사문화탐방 현장학습을 온 명철이는 산성의 동문 문루에서 금정산 생태문화 해설사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다가 피 하고 웃었습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짝 지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웃어?”

저런 거짓말을 누가 믿어그때 아무도 살아 보지 않았는데옛날 일을 믿으란 말이야?”

명철이가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습니다.

그럼 넌 이순신 장군세종대왕도 안 믿는단 말야?”

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명철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나도 살아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난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겠어넌 내가 어제 집에서 뭘 했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후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명철이가 팔짱을 끼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지후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럼 네 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다 가짜일 수 있다는 거네그건 좀 심하다.”

나는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꼭 옛날로 돌아가 볼 거야그러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안 그래?”

명철이가 자신 있게 말하자 지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그때 선생님의 눈초리가 명철이와 지후에게 향했습니다선생님이 눈을 부릅뜨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명철이와 지후에게 차례로 꿀밤을 먹였습니다.

예끼이 녀석들여기 와서까지 말 안 듣고 잡담을 해?”

명철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만졌습니다지후는 선생님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너희제일 앞으로 가!”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말하자 명철이와 지후가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갔습니다그때 해설사 아주머니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러분이제 이 길을 따라 망루로 가서 금정산을 둘러볼 테니 질서 있게 이 동해 주세요!”

선생님이 맨 앞에서 지켜보고 있자 친구들이 서둘러 줄을 맞췄습니다선생님의 인솔로 친구들이 해설사 아주머니의 뒤를 따르며 성벽 길을 갔습니다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맑은 가을 하늘이 훤히 드러났습니다때마침 근처의 산봉우리를 유유히 넘어가던 구름은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친구들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성을 올랐습니다그런데 성가퀴 너머를 흘깃흘깃 보던 명철이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리더니 명철이가 눈을 반짝였습니다명철이가 슬슬 눈치를 보다가 옆에 있던 지후에게 속닥였습니다.

산이 다 거기서 거긴데특별한 거 있겠어어차피 망루에 가면 또 지루한 설명 들을 테니까 우리 몰래 다른 데 가 보자.”

어디?”

지후가 걱정 섞인 눈으로 물었습니다.

일단 따라와 봐.”

명철이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지후 손을 잡아끌며 대열에서 벗어났습니다지후는 엉겁결에 친구들과 멀어지는 명철이를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명철이가 발걸음을 빨리 하며 가다가 곧 방향을 꺾어 성가퀴 쪽으로 갔습니다명철이가 구부러진 성가퀴 아래에 후다닥 몸을 숨기자 지후도 냉큼 몸을 숨겼습니다.

아까 오면서 봤는데신기한 구멍들이 뚫려 있더라고우리 가서 전쟁놀이나 하 자.”

명철이가 성가퀴 앞에 서더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성가퀴 너머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지후도 성가퀴 너머를 내려다보다가 움찔했습니다.

우와높다근데 아까 선생님이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겁쟁이그냥 내려다보기만 하는 거잖아근데 옛날에 여기 있는 구멍에서 활을 쐈다고 하잖아얼마나 재밌었을까?”

명철이가 성가퀴에 난 구멍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전쟁이 무슨 장난이야그리고 너아까는 옛날 일들을 하나도 안 믿는다고 했 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옛날 군인들처럼 이 구멍으로 밖을 한 번 내다보자는 거지.”

지후가 망설이는데명철이가 허리를 숙여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에 얼굴을 가져갔습니다.

너도 한 번 봐 봐성 밖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후도 명철이를 따라 다른 타()에 난 구멍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습니다.

답답할 줄 알았는데정말 성 밖 풍경이 환히 보이네전쟁이 나면 무서웠겠 다.”

지후가 성 밖을 내다보며 감탄했습니다그런데 명철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한 발짝 물러나 성가퀴 밑을 둘러봤습니다성가퀴 밑엔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습니다도토리에 눈이 간 명철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명철이가 재빨리 도토리 몇 개를 줍더니 하나씩 구멍 밖으로 힘껏 던졌습니다명철이는 신이 나 있었습니다명철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지후도 주운 도토리들을 하나씩 구멍 밖으로 던졌습니다그런데 그때였습니다갑자기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높은 성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대신 돌들이 차곡차곡 쌓인 돌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순식간에 낯설게 변한 세상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그때 담 너머에서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야힘들어 죽겠는데누가 자꾸 돌을 던지며 장난치는 거야?”

명철이와 지후가 까치발을 하고 슬그머니 담 너머를 내다보다가 기겁했습니다가끔 책에서나 보던 옛날 사람이 두건과 저고리 차림을 한 채 새카맣게 탄 얼굴을 찡그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명철이와 지후는 황급히 담 아래로 몸을 숨겼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겁먹은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습니다명철이와 지후가 눈빛을 주고받은 뒤 함께 일어났습니다그리고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담 너머를 내다봤습니다그런데 순간 명철이와 지후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웬 놈인가 했더니 너희가 그런 게로구나맹랑한 녀석들 같으니라고너희꼼짝 말고 게 그대로 있거라!”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큰 소리로 꾸짖더니 돌들이 잔뜩 얹어진 지게를 등에서 내려놨습니다아저씨는 씩씩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담 앞에 놓여 있던 사다리를 부리나케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얼굴이 발개진 채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아저씨는 능숙한 솜씨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어느새 담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아저씨가 담 너머 성벽 길에 발을 딛고는 명철이와 지후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습니다그런데 명철이와 지후를 노려보던 아저씨의 눈이 커다래졌습니다명철이와 지후를 가는눈으로 훑어보던 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별 희한한 복장을 다 보겠네그건 그렇고 어린 녀석들이 감히 어른한테 돌을 던졌겠다?”

아저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겁에 질려 꼼짝 않고 고개만 푹 숙였습니다그런데 명철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저씨지금이 어떤 시대예요?”

아저씨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명철이를 바라봤습니다.

뭐야아니이 녀석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장난을 치나지금이 어떤 시대 긴 어떤 시대야왜놈들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하루빨리 성을 쌓아 나라 를 지켜야 하는 시대지.”

그런데 그때 지게를 지고 길을 지나던 스님이 명철이와 지후를 보고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아니이 험한 곳에 웬 꼬마 친구들이냐?”

스님이 지게를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스님도 명철이와 지후의 행색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지만명철이와 지후는 스님이 반가워 얼굴을 활짝 폈습니다스님이 그제야 아저씨를 보고 몸을 돌려 합장하자 아저씨도 표정을 바꿔 합장했습니다.

근데 이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스님의 물음에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습니다.

글쎄이 녀석들이 한창 돌을 쌓느라 바쁜 제게 돌을 던져대지 뭡니까?”

명철이와 지후는 아저씨의 말을 듣고 긴장했습니다.

아저씨 말이 사실이더냐?”

스님이 인자한 얼굴로 묻자 명철이가 말없이 쥐고 있던 손을 펴 스님에게 내밀었습니다명철이의 손바닥 위에는 던지지 못한 도토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허허아무리 작은 도토리라 해도 그렇지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분에게 던지면 쓰나?”

스님이 나무라자 명철이가 머리를 긁적였습니다그때 잠자코 있던 지후가 쭈뼛거리며 나섰습니다.

사실 저희는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왔다가 선생님 몰래 잠깐 빠져나와 여기서 놀고 있었거든요그런데 옛날에 일어난 일들이 진짜인지 궁금해서…….”

지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습니다.

방금 무슨 말을 한 것이냐?”

스님이 눈을 크게 뜨며 지후에게 몸을 기울였습니다아저씨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후를 쳐다봤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자신들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다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이 녀석들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또 해찰하고 있었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명철이와 지후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습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선생님이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선생님을 보고 반가워하다가 주위를 휘둘러봤습니다하지만 방금까지 있었던 아저씨와 스님은 물론이고 돌담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딴청을 부리네얼른 제자리로 안 가지한 번만 더 말 안 들으면 너희는 여기에 두고 갈 줄 알아!”

선생님이 앞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습니다선생님이 가리킨 쪽엔 어느 틈에 와 있었는지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습니다친구들은 명철이와 지후를 바라보며 깔깔거리고 있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하지만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의 영문을 몰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꿈을 꾼 걸까아까 너도 분명히 봤지?”

난 지금도 아저씨와 스님의 얘기가 귓가에 생생하다니까!”

명철이가 지후에게 대답하며 입을 헤벌렸습니다.

그럼 너이제 역사를 믿는 거야?”

너라면 안 믿겠니?”

지후와 명철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얘기했습니다그때 명철이와 지후의 대화를 듣던 친구들이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습니다명철이가 친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펴 손바닥을 바라봤습니다도토리는 아직도 손바닥 위에 고이 놓여 있었습니다지후도 손을 펴 도토리를 가만히 바라봤습니다그때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타기 위해 이동하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도토리를 각자의 바지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습니다명철이와 지후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뒤돌아 비밀의 성가퀴를 바라봤습니다아저씨와 스님이 성가퀴를 단풍같이 곱게 비치는 가을 햇살 속에서 당장이라도 나타나 다시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