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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금샘문학상수상작 수필부문
  • 이름 관리자
  • 작성일 2018-08-21
  • 조회 123

수필(박대겸)

 

<1. 금정산과 산고양이_귀향1>

 

지쳤던 것이겠지흘러갈 줄만 아는 강물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서울 생활속내를 터놓을 친구나 연인 없이 독거노인처럼 외롭기만 했던 자취 생활무엇을 위해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살았던 걸까결국 나는 7년여에 걸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을 선택했다.

서른다섯 먹은 아들의 갑작스런 귀향에 부모님은 내심 걱정이 크셨겠지만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주었다나는 유아시절로 퇴행한 것마냥 먹고 자고 싸는 일만 반복했다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처음 일주일은 좋았다아니처음 일주일만 좋았다부모님의 속마음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왔다언제까지 쉴 생각이니이제 슬슬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네가 마음만 먹으면 선 자리는 여러 군데 구할 수 있는데.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부풀대로 부푼 풍선이 빵 하고 터진 뒤엔 아무리 바람을 불어본들 풍선은 다시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마치 그렇게 터져버린 풍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고무엇을 안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가만히풍선의 찢어진 부분이 저절로 접붙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이건 그저 비유일 뿐이고나는 체하는지도 모른 채 눈칫밥을 꿀떡꿀떡 삼키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어느 순간 침대에 누워 있는 건지 지압기 위에 누워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무엇보다 가만히 있는다고 풍선의 찢어진 부분이 저절로 들러붙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구서동 뒤편으로 연결된 금정산 등산로를 거닐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물경 10년 남짓을 한동네에 살았음에도 동네 뒤편으로 연결된 금정산 등산로를 밟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4월의 중순이었고봄 햇살의 따스함이 정점에 이르던 시기산길을 따라 이름표가 붙어 있는 나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날이 갈수록 푸르름이 더욱 푸르러지던 때였다.

초반에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올랐다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중년노년의 사람들을 종종 마주쳤다며칠을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만 다니다 보니 문득 다른 길로도 가보고 싶었다그래서 어떤 날은 부산대 방향으로 가보기도 했고어떤 날은 부산외대 방향으로 가보기도 했다.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모르겠다아니아마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 것이고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었을 것이다그날은 하늘이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흐리기는 하지만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없었기에 오후 4시가 되어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전날 내린 비 때문에 산길은 군데군데 질퍽했고없던 물길이 산책로를 가로지기도 했다나는 최대한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자가능하면 바지를 더럽히지 않고자단단한 땅을 찾으며 걸었다그렇게 물길과 진흙을 피해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서고 말았다엄밀히 말하자면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 않은 장소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는 했는지 신발 자국이나 신발에 밟힌 풀들이 눈에 띄었다그렇지만 아무래도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니만큼나의 등장을 반겨준 건전날 비에 젖은 집을 다시 지으려는 커다란 거미들이나나뭇가지에 가는 줄 하나 매달아 둔 채 허공에서 꿈틀대는 형광색 애벌레들나는 거미애벌레그리고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각종 벌레들을 벗삼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내심 어린아이가 되어 모험을 떠나는 기분도 들었지만한편으로는 인적 드문 산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시로 휴대전화 수신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다섯 시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하늘을 뒤덮은 구름 탓에 산 속은 어둑어둑했다어딘가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울부짖는 늑대 소리처럼 들렸다나는 산을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원래 산책로와 이어질 수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떤 사건이라도 발생하길 바랐던 걸까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생기길그래서 뜯어진 풍선이 다시 이어 붙길 바랐던 걸까하지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부풀기만 하던 내 상상력은 어처구니없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30분쯤 걸었을까밀림을 헤쳐 나가는 기분으로 각종 풀들이 돋아난 곳을 지나자 산책로의 경계를 구획지어 놓은 노끈 하나가 허리 높이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노끈 가운데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

통행금지’.

산책로 쪽으로 다가가며 좌우를 살펴보았다마침 부근을 통행하는 사람은 없었다나는 통행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노끈을 넘어 통행이 금지되지 않은 산책로로 돌아왔다처음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 허탈한 웃음이 났다혼자만 설렜던 모험 아닌 모험이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고 만 것이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다다랐을 때내 모험을 축하할 작정인지 비웃을 심보인지 산책로 옆 바위 위에 황토색 산고양이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으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5미터어라안 도망가네. 4미터아직 안 도망가네하지만 3미터쯤 다다르자 나를 피하려는 건지 내가 귀찮은 건지 고양이는 바위 위에서 내려가더니 사라져다그러면 그렇지그다지 아쉬운 마음도 없이 휴대전화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사라진 줄만 알았던 고양이는 3초도 지나지 않아 산책로로 들어서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신의 몸을 내 다리에 비벼댔다나는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찍으며다른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10여초 정도 내 손길을 느낀 고양이는 다시 바위 뒤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산고양이 역시 딱 그 모양이었다다시는 안 볼 사람인양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무정한 고양이 하고는.

나는 픽 웃으며 사라지는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러다가 문득풍선의 찢어진 부분이 조금쯤 이어 붙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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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온천천과 왜가리_귀향2>

 

시간에 휩쓸려 살던 시절에는 몰랐던 것도심지 곳곳에도 나를 봐달라는 듯 각종 빛깔의 꽃나무들이 자란다는 것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녹색 나뭇잎과 총천연색 꽃잎이 피어난다는 것잠시만 서서 둘러봐도 알 수 있는데 왜 그땐 몰랐을까왜 그땐 느끼지 못했을까풍경이라는 건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눈에만 들어올 뿐 머리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나는 온천천변을 걷기 시작했다온천천이 흐르는 소리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지하철이 달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아이들이 아장대는 모습각종 식물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나는 온천천변을 걷기 시작했다정신과 의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즈음 의사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강조하며 말했던 것옛날과 달리 요즘 같은 세상에선 정신과 다니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현대인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알고 보니 주변에도 정신과 다녔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라멀쩡해 보이는 연예인 중에서도 정신과에 다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물론 당신들의 바람대로 나는 정신과에 다니는 일을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여러 차례 아픔을 느낀다그리고 어딘가 아픈 부위가 있는데 그 부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찾는 곳그곳이 바로 정신과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상담이 끝났을 때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이 담긴 용지를 내어 주었다질문 내용에 답을 하는 일은요컨대 일종의 짤막한 자서전을 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나의 기억을 통해 나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하려는 일인 듯했다선생님 말에 의하면그렇게 글을 쓰는 동안 자기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해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켠 채 질문들을 곱씹어 보았다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하나머릿속에서는 내가 가끔씩 생각하는 사건과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건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그러나 떠오르기가 무섭게 사라졌다나는 무엇을 떠올리고 싶은 걸까혹은무엇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걸까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얼마간 웹서핑만 하다가 노트북을 껐다.

며칠 뒤 병원에서 나와 마치 오랫동안 반복했던 일인 듯 익숙하게 온천천변을 걷기 시작했다이렇게 좋은 산책 코스를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나는 동물원에 처음 간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걸었다그러다가 지하철 부산대역에 다다라서 몇 마리 오리들이 짝을 이루어 온천천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처음엔 누군가 오리 인형을 만들어서 띄워둔 거라고 생각했다궁금한 마음에 멈춰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꼼짝 않던 오리들 중 두어 마리가 물 안으로 고개를 처박거나 함께 있던 다른 오리에게 몸을 비비거나 했다온천천에 오리가 다 있구나나는 반색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에 담았다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엔 이름이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 새 한 마리가 보였다학인가백로인가무슨 새더라그 새는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한 다리로 물 위에 서서 물 아래를 살펴보더니 갑자기 푸드득 날아올라 내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나는 그 새가 날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도심 한가운데에 저런 새가 다 날아다니네그 새는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날개를 접더니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나는 왠지 모르게 그 새에게 이끌려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내가 다가오는 게 싫었을까아니면 그쪽에도 먹을 만한 게 없었을까몇 초 머물지도 않은 채 그 새는 다시 날아올랐고이번에는 조금 더 먼 하류로 날아가 버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새 도감을 뒤지기 시작했다이름이 곧장 떠오르지 않는 그 새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며아까 봤던 새와 비슷한 새를 찾아보았다.

왜가리였다.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새 이름.

책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왜가리는 물가에 혼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였다. “날 때는 목을 꼴로 굽히고 다리는 꽁지 바깥쪽으로 뻗으며보통은 날카롭게 --’ 하고” 울지만위험을 느낄 때면 “‘’ 하고 짧게 소리를 내서 다른 새들에게 알린다고 나와 있었다왜가리에 대한 설명을 보니 단박에 알게 되었다오리보다 왜가리에게 좀 더 눈길이 갔던 이유물론 오리에 비해 흔하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지만아마 이 내용 때문이었던 것 같다움직이지 않고 혼자 서 있다는 점.

그날 이후 병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온천천변을 걸었다어차피 걷는 일은 늘 하는 일이었다그저 장소가 금정산 등산로에서 온천천변으로 바뀌었을 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장소가 바뀐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언젠가부터 나는 왜가리를 보기 위해 온천천변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왜가리를 보는 날도 있었고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온천천의 길이에 반해 왜가리의 수가 적은 탓이겠지왜가리가 눈에 띄면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기도 했고왜가리처럼 가만히 서서 왜가리를 지켜보기도 했다왜가리가 우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울 만한 일이 없었겠지위험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고.

며칠 후에야 알게 된 사실왜가리라는 새정확히 말하면 왜가리라는 기표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이수명의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때문이었다대학 시절문학 전공자랍시고 책을 읽고 사 모으는 데 눈에 불을 켠 적이 있었는데그 무렵 샀던 책이었다그 시집을 발견하자 내가 한때 시를 쓰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두더지잡기 게임의 두더지처럼 불쑥 솟아올랐다물론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내 언어 재능의 박약함으로 금세 꺾이고 말았다아니재능 운운하는 건 핑계일 테고실은 욕망의 색조가 옅었던지 의지의 강도가 물렀기 때문일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동안 글쓰기에 대한 소망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살았다.

잊고 살았군.

까맣게.

왜가리도.

오랫동안.

글쓰기도.

이수명 시인은 아마 왜가리가 물가에 혼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표현을 생각해냈겠지.

그래왜가리도 왜가리놀이를 하는데 나라고 왜가리놀이를 못할 것 있으랴.

왜 여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좋다이제는 내가 왜가리놀이를 할 차례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준 질문 용지를 다시 펴 들었다노트북을 켰다나만의 왜가리놀이는어쩌면 자서전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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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남기억금정도서관_귀향3 >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과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있다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술 마시듯 술술소변 보듯 쉬이쉬이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과그것을 문장으로 정갈하게 옮기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구서동에 살기 시작한 20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길가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눈에 들어오는 절반은 나뭇잎일 만큼나무들은 울창해져 있었다그리고 무더위와 함께 기습적으로 찾아온 매미 소리이따금 매미는 아파트 베란다 방충망에 들러붙어 울기도 했다더위와 소음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글쓰기땀과 짜증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여름.

몇 시간만이나마 더위를 피해볼 요량으로 동네 카페에 드나들던 어느 날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10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친구서울에서 지낼 때도 부산에 내려올 때면 종종 연락해서 술을 마시던 친구그는 길모퉁이에 있는 건물 옆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친구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놀라움과 반가움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았다알고 보니 친구는 올해 초부터 그 건물에 있는 공간 하나를 빌려 영어교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했는데따지고 보니 같은 동네에 있으면서 몇 달 동안 마주치지 않은 것이 외려 이상한 일이었다나는 완전히 부산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결혼하고 원래 남산동에 살던 친구는 작년에 지하철 범어사역 근처로 이사했다고 했다.

내 머릿속 검색창에 범어사역이라는 키워드를 쳐 넣으면 연관 검색어로 금정중학교가 떠오른다. 3년 동안 범어사역에서 내려 금정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겠지더불어 금정도서관중학교 3학년 때 금정도서관이 완공되었고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짓이라면 골라가며 하던 그 시절점심시간이 되면 허술했던 학교 담장을 넘어 금정도서관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라면이나 우동을 사먹곤 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그 이후로도 자주 찾아갔던 것 같은데마지막으로 금정도서관에 간 게 언제였더라군대 전역하고 나서 사귄 여자친구와 도서관 데이트할 때가 마지막이었나그럼 지금으로부터 무려 12년 전인가?

친구가 수업을 마치고 저녁 9시 무렵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근처 대패삼겹살 집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나는 최근 몇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평범한 하루의 일과를 읊조리는 듯 말했고얼마 전에 다시 솟아난 소망그러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프로야구 개막식 시구자의 긴장된 마음으로 살포시 던져주었다그러자 친구는 격하게 반가워하며 내 수줍음을 단숨에 장외 홈런으로 날리면서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언젠가 네가 다시 글을 쓰겠다고 할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둥한국 작가들의 문체의 차이점을 설명해준 적도 있었다는 둥주변에 너처럼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둥마지막 학기에는 다른 애들이 취업 때문에 이력서 넣는 것처럼 이곳저곳에 투고를 하지 않았느냐는 둥(결국 모조리 떨어지고 말았지만). 나도 잊고 있던 나의 과거듣고 있노라니 부끄러움이 이마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어차피 술기운 탓에 얼굴은 불콰해져 있었다잠시 후 일을 마친 친구의 와이프도 도착했다친구의 부인이라고 해도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기에 편하게 대화하는 사이였다친구는 자신의 아내에게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했다그 이야기를 듣던 그녀 역시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일을 알려주었다.

맞아그러고 보니 너 처음 만난 곳도 금정도서관 아니가처음 만나자마자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느니 어떤 책이 재밌다느니 그런 이상한 얘기나 하고 말이지.”

이튿날 오전일어나자마자 나는 곧장 지하철역로 향했다금정도서관에 가보기 위해서였다전날 술자리 덕에 궁금함은 더해졌다. 12년 전에 마지막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간 것 같았다어찌됐건 오랫동안 안 간 건 사실이었다상경하고 나서는 한 번도 안 갔으니 최소한 7년 이상은 안 간 셈이니까집에서 범어사역까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밖에 안 되는 거리한 달 전이었다면 걸어서 갔겠지만이 더위에 걸어갔다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푹 절은 땀 냄새와 시뻘건 얼굴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범어사역에서 내려 금정중학교를 눈으로 훑으며금정도서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학교 담장은 튼튼하게 바뀌어 있었다. (7,8년 전에 이미 바뀐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금정구는 몰라보게 바뀌었는데 도서관도 많이 바뀌었을까이런 궁금증을 안고 금정도서관 앞에 다다랐다뜻밖에도 내가 기억하던 도서관과 별다른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외부의 3층 계단그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90년대 정취가 느껴지는 반듯한 4층 건물이 다가왔다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지하 1층에서부터 지상 4층까지 꼼꼼히 둘러보았다그래여기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밥을 먹었지맞아여기 쉼터 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했었고그래고등학생 땐 여기 열람실에도 자주 드나들었는데맞아전역하고 몇 년 뒤에 취업 준비하던 군대 선임이랑 이 복도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어휴대폰 전화번호가 어딘가에 유출됐는지 자꾸 이상한 전화가 와서 복도에서 몇 차례 받은 것도 떠올랐고그걸 소재로 짤막한 소설을 썼던 사실도 떠올랐다더불어 그 사건 때문에 전화번호를 바꾼 기억까지.

30여분 기억을 더듬으며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3층에 있는 종합자료실로 다시 들어갔다서재에 있는 책들을 손에 집히는 대로 훑어보았다창밖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바람이 분다고 쓰지 말고 나뭇잎이 흔들린다고 쓰라고 한 작가가 누구였더라네다섯 권의 책을 빼내와 책상에 앉아 내키는 대로 읽었다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밥을 먹고 나서 다시 3층 종합자료실로 올라가 책을 읽었다가끔 졸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책 한 권을 대출했다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작법서 <연필로 고래 잡는 글쓰기>. 부제는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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